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자유시 참변 (문단 편집) === 러시아 연해주 독립군의 상황 === 러시아 연해주의 '의병'들은 독립군이 아니며 주로 한인계 러시아인 2세라는 설이 있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대체로 연해주의 의병도 독립군이라고 보고 있으며 러시아 귀화인들 중에 적군에 들어간 인물도 있으나 이는 소수라는 것이 현재까지의 견해다. >전쟁에 참가함으로써 러시아사회 내에서 일정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귀화 한인들로서는 소비에트 적군 편에 서는 것을 꺼린 것으로 보인다.''' 내전에서 소비에트 적군이 승리한다면 사회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날 것이고 이는 지금까지 애써 쌓아올린 자신들의 지위가 송두리째 흔들리게 됨을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장교 출신들은 대부분 적군 편에 서기보다는 백군 편에 서는 것을 택했다.뒤에 살펴볼 호르바트 백군 내 한인부대에는 장교가 100여 명이었다는 기록도 있다.130)이 기록이 과장되었을 수도 있고, 이들 중 많은 수가 호르바트군에 들어가면서 진급했을 수도 있지만, 그렇더라도 많은 수의 한인 장교들이 백군편에 섰음을 보여주는 방증자료 로는 충분한 가치가 있다. 장교 출신으로 소비에트 적군편에 서서 빨치산 운동을 했던 한창걸,오하묵 등이 오히려 예외적인 경우였다. > >이를 통해 시베리아 내전시기 소비에트 적군 편에 서서 백군 및 일본군과 싸웠던 한인 빨치산부대 구성원들의 출신성분을 짐작할 수 있다.'''그들은 대부분 귀화하지 않은 한인, 즉 여호인이었다. 러시아지역 한인 빨치산부대의 근간은 연해주 지역의 기층민중들인 비귀화 한인들과 간도와 조선으로부터 건너온 청년들이었다.''' 즉 러시아지역 한인들에게는 러일전쟁으로부터 제1차 세계대전까지 여러 차례의 군사 경험이 있었음에도 그 경험들이 시베리아내전 시기 한인 빨치산부대의 활동에 미친 영향은 극히 부분적이었다. 부대에 미친 군사적 영향은 오히려 일본과 중국의 사관학교에서 군사교육을 받고 연해주로 온 군사지휘관들이나 간도에 설립된 여러 한인 군사교육기관을 통해 군사적 소양을 쌓은 한인 청년들로부터 나온 것으로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 >윤상원,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1918-1922, 학위논문(박사)-- 高麗大學校 大學院: 韓國史專攻 2010. 2, 60~61 [[http://www.riss.kr/link?id=T11949624|#]] 그리고 연해주의 한인들의 항일부대는 '''대부분이 독립군이었다.''' 이는 반공 우익 성향인 [[권희영]] 교수의 논문에도 나오는 사실이다. >볼셰비키의 승리에는 파르티잔이라고 호칭되는 자발적인 민중들의 무장부대가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이 파르티잔의 존재는 백군들에게는 분명한 부담으로 작용하였다. 민중들을 선동하는데 보다 능숙한 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볼셰비키는 민중의 무장부대를 그들 편에 흡수하는데 성공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한인들에 의해 조직된 무장부대도 결국은 볼셰비키들의 민족해방운동의 지원에 대한 약속, 그리고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었던 한인들에 대한 해방의 메시지가 큰 역할을 하였다고 하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 >권희영, 자유시 사변 연구, 한인 사회주의 운동연구, 서울: 국학자료원, 1999, 176~177 >한인 무장부대는 만주에서나 '''노령'''에서나 일군과의 직접적인 전투를 마다하려 하지 않았다. 물론 일본군과 대규모의 전투를 벌이는 것은 한인무장부대의 목표가 아니었다. 한인무장부대는 우선적으로 무장역량을 강화해나가면서 외교적 상황을 고려하여 '''한국의 독립운동을 계속한다는 것'''이 기본적인 목표였으며 소비에트 러시아와의 관계에 많은 기대를 가지게 된 이유는 소비에트 러시아가 '''한인의 독립운동에 민족해방운동의 지원이라는 명분 하에 한 약속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에도 분명한 오해가 존재하고 있었다. 한인들로서는 '''민족해방운동이란 한국의 독립을 위한 운동이었다.''' 그러나 러시아로서는 한인들의 민족해방운동의 지원이란 종종 그보다는 한인사회에 사회주의를 유포시키고 계급투쟁을 야기하는 것이었다. >---- >권희영, 자유시 사변 연구, 한인 사회주의 운동연구, 서울: 국학자료원, 1999, 178~179 그런데 문제는 이들이 하나로 통합되어 있지 않았다는 데 있다. 당시 치타(Чита)에 수도를 둔 러시아의 소비에트 공화국[* [[소련]]의 정식 수립은 1922년이다. 다만 러시아라는 호칭도 오류가 있다. 당시엔 다른 지역도 국가명+소비에트 공화국으로 표시했는데 이 국가들이 모스크바와 분리된 독립국가는 아니었다.] [[극동 공화국]]에서는 2개의 한인 단체가 주도권 다툼을 벌이고 있었는데 본 문서에서는 편의상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로 지칭한다. '''상해파'''[*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한 경력이 있어 상해파라고 부른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민족주의, 독립 추구 성향이 상대적으로 강했다.]는 한인사회당[* 한인사회당(1918.5.11) → 공산주의자그룹(1920.봄) → 상해파 고려공산당(1921.5)]에 기반했으며, 자신들의 [[한인]] 조직에 조선인 [[빨치산]] 부대인 '니항부대'[* 독립군 부대다. [[http://www.okpedia.kr/Contents/ContentsView?localCode=cis&contentsId=GC95300195|한국학중앙연구원 링크]] 다만 [[니콜라옙스크 사건]] 등 [[러시아 내전]] 당시 [[야코프 트랴피친]]의 민간인 학살에 연루되었다는 흑역사가 있다. [[https://cafe.naver.com/booheong/194250|#]]]를 합쳐 '''[[사할린부대]](대한의용군)'''를 만들었다.[* 니항부대가 [[무정부주의자]] 트랴피친의 휘하에 있었기 때문인지 [[사할린 부대]]에도 아카니스트 성향이 있었다는 말이 있다.] 상해파의 영수는 [[이동휘]]였으며 러시아 공산당 극동국 한인부의 후원을 받았고 [[모스크바]]의 [[코민테른]]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한편 '''이르쿠츠크파'''[* 전로한인공산당(1919.9.5) → 이르쿠츠크 공산당 고려부(1920.1.22) → 전로고려공산당 중앙총회(1920.7) →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1921.5)]는 [[대한국민의회]] 계열 인사들이 주도했으며 자신들 나름대로 '''자유대대(고려혁명군)'''라는 무장단체를 조직했다. 이르쿠츠크파는 '노령(러시아)파'라고도 불렸는데[* 상해파에 비해 민족주의 성향이 약했고 공산주의, 친러 성향이 강했다.] 이후 '코민테른 극동비서부'[* 이 극동비서부가 [[이르쿠츠크]]에 위치해 있어서 이르쿠츠크파라는 이름이 붙었다.]가 출범하자 후원을 받게 된다. 위에 [[코민테른]]은 상해파와 연결되어 있다고 서술해서 헷갈릴 수도 있지만 [[모스크바]]의 코민테른 본부에서는 극동 지역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러시아 [[극동]] 지역을 일임하려고 코민테른 극동비서부를 만든 것이니 당연하다.] 이런 엇박자가 가능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